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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억 컬럼] 상처의 대물림을 막으려면(20150323)

죠이선교회 2015. 3. 23. 17:01

상처의 대물림을 막으려면


김수억 대표


요한복음 5장을 보면 베데스다 못에 있던 38년된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병을 고치는 과정은 매우 간략하게 다룬다. 예수님은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시고 곧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명하시는 것으로 대화는 끝이 난다. 물론 그 중간에 38년된 병자의 말이 있지만, 38년된 병자의 말은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답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하소연에 가깝다. 나는 38년된 병자의 하소연에 집중해보길 원한다. 아니 왜 요한은 38년된 병자의 하소연에까지 독자를 집중시키고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요한은 상처입은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38년된 병자는 38년 동안 몸이 아프면서 마음도 많이 아프고 병들었다. 왜 그렇지 않았겠는가? 누군가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날 돌봐주는 가족이라도 가까이 있었다면... 아픈 몸은 마음을 병들게 하고만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에게 쏟아져 나온 것이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라 매우 복잡하다. 복잡하다는 것은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없는 많은 요소들에 영향을 받아왔고 받고 있는 존재라는 측면에서 그렇다. 너무 복잡해서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 사람 속은 알 수 없다. 그 사람의 인식 속에서든 혹은 인식 밖에서든 사람은 과거에 경험한 것으로 인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것이 무엇인지 지금의 상대는 알지 못한다. 그런 측면에서 38년된 병자도 다르지 않고,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도 다르지 않다. 물을 좀 달라하는 예수님에게 이 여인은 '유대인' '남자'가 왜 사마리아인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고 따져 묻는다. 그것은 그 여인이 사마리아인으로서 유대인에게 받은 상처가 적지 않고, 여자로서 남자에게서 받은 상처가 큼을 반증한다 하겠다. 상처란 그렇다. 전혀 그 원인을 제공하지 않은 사람에게 드러냄으로 그 사람또한 근거없는 상처를 받게하고 그것이 또 다른 억울함을 만들어 내는 '억울함'의 악순환을 이어가게 만드는 것이 상처다. 


얼마전 죠이 중견간사 12명이 1박2일간 '전략회의'라는 이름으로 모였다. 회의만 11시간을 했다. 안건은 참석하는 간사들이 제안한 것을 중심으로 했다. 과거에 대한 문제제기도 있고, 미래에 대한 제안도 있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것이지만 정리되지 않아 혼선을 빗고 있는 주제도 있었다. 때로는 평온하게 때로는 민감하고 치열하게 논의하는 시간이었다. 모든 안건이 원만하게 합의되었다고 볼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충분하게 자신들의 견해를 이야기했던 자리였다. 난 그 전략회의의 회의 진행자로 회의를 진행하느라 곤욕을 치르기도 했지만 만족스러웠다. 우선 오랫동안 이런 시간을 가지지 못했는데 가질수 있었서 좋았고, 서로가 어떤 가치관과 고민을 가지고 있는지 분명히 알수 있었서 좋았다. 그러나 회의를 진행하면서 느낀 한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많은 상처를 가진 개인이면서 공동체구나 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상처는 우리 논의의 본질을 왜곡시키기도 하고, 과도한 보완장치를 만들어 자칫하면 그 보완장치가 새로운 문제를 발생시킬 수도 있겠다는 우려를 하기도 했다. 이전에 경험한 상처가 반복적으로 다른 형태의 상처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도 되었다. 이 상처의 대물림을 막을 방법이 없을까?


나는 '생각'하는 사람, '생각'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길거리에 흔히 보는 단순한 자판기도 우리가 원하는 대로 반응하지 않을때, 화를 내기 전에 동전은 제대로 넣었는지.. 혹은 '품절'된 제품의 버튼을 누르지 않았는지 생각해보는 것처럼 우리는 자신의 과오가 있지 않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자신의 입장이 '객관성'을 잃지 않았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상대가 왜 저런 입장이 되었는지, 왜 저런 방식으로 표현하는지에 상대의 입장에 대한 '생각'을 해 보아야 한다. 그래야 상처의 대물림을 막을 수 있다. 그렇다면 '회의를 통한 결정'만큼 중요한 것은 '회의 이후'라 하겠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많은 '생각할 거리'를 가지고 왔다. 그래서 머리는 아프지만, 수확은 있다.